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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인생 최악의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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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8 17:31
전 유럽을 호령하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대육군은 러시아의 끝없는 설원에서 참혹한 실패를 맛보았다.
한때 60만에 달하던 러시아 원정군은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그를 굳게 믿던 동맹들마저 하나둘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군대를 떠받칠 보급 체계는 사실상 붕괴되었고,
더 이상 징집할 수 있는 프랑스의 청년들조차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그 어느 때보다 극한의 상황에 몰려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최악의 상황에 몰린 그를 적들은 가만두지 않았다.
러시아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영국
스웨덴 왕국 등
유럽의 강대국들은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해 나폴레옹의 목을 조여 왔다.
연합군이 동원한 총병력은 무려 100만 명을 훌쩍 넘어섰고,
이들은 유럽 각지에서 일제히 반격을 개시했다.
프랑스 제국은 이 거대한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연합군에 반격하기 위해 움직였다.
독일 동맹국들의 지지를 잃지 않기 위해 나폴레옹은 라인 강 서쪽으로 후퇴할 수 없었고
그 결과 엘베 강은 전략적으로 프랑스 제국의 최종 방어선이나 다름 없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본국과 동맹국이던 뷔르템베르크 왕국, 작센 왕국 등에서
긁어모은 병력 약 19만 명을 엘베 강 서쪽으로 이동시켰고,
그 병력을 라이프치히 근교에 집결시켰다.
이는 당시 프랑스 제국이 독일 전선에 투입 할 수 있었던 사실상의 모든 전력이었으며,
나폴레옹은 이 전투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스웨덴 왕국 등이 이끄는
연합군의 병력은 무려 33만 명에 달했다.
연합군이 동원한 대포는 약 1500문, 이는 나폴레옹이 동원할 수 있는 대포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였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 제국에게 유리한 조건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남아 있던 희망은 오직 하나, 나폴레옹 그 자신뿐이었다.
전투를 앞두고 나폴레옹은 스웨덴 왕국과 프로이센 왕국의 군대를 상대로 전초전을 벌였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윽고 연합군의 대군이 사방에서 라이프치히로 접근하기 시작하자,
그는 전 병력을 라이프치히 일대로 집결시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1813년 10월 16일
러시아 제국군과 프로이센 왕국군이 공세를 개시하며, 라이프치히 전투가 시작되었다.
연합군은 남쪽에서 결정적인 돌파를 노렸고,
러시아 제국군은 라이프치히 남쪽의 바하우(Wachau) 일대로 진출해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프랑스군이 치밀하게 구축한 방어선이 기다리고 있었고,
러시아군은 매복과 집중 포격에 큰 피해를 입은 채
결국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북쪽 전선에서도 프로이센군이 프랑스군 진지를 압박했지만,
프랑스 포병대의 맹렬한 포격 앞에서 공격은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라이프치히 북서쪽에서도
약 2만 1천 명 규모의 프로이센 왕국군이 뫼커른(Möckern) 일대로 진입했다.
이 부대는 척탄병 대대와 라이프 근위 연대가 포함된 정예 병력이었고,
이에 맞선 프랑스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프랑스 해병 보병대의 적절한 증원과 포병대의 집중 포격이 가해지자
프로이센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격퇴당했다.
반격에 성공한 프랑스군은 마치 승기를 잡은 듯 보였다.
그러나...


그 순간 프로이센 왕국군의 기병 돌격이 시작되었다.
브란덴부르크 후사르 연대는 프랑스 보병대를 향해 거침없이 돌격했다.
프랑스 보병대는 급히 사각방진을 형성해 대응했지만,
후사르들은 망설임 없이 방진 속으로 파고들었고
프랑스 보병대는 순식간에 전열이 무너지며 패주하기 시작했다.
후방의 프랑스 포병대가 기병을 향해 포구를 돌렸으나,
흩어져 도망치는 아군 보병들이 포격 사선을 가로막았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은 후사르들의 돌격으로,
프랑스 포대는 통째로 노획되고 말았다!

날뛰는 프로이센 기병대를 저지하기 위해 뷔르템베르크 왕국 기병연대 두 개가 급히 투입되었다.
그러나 이들마저 연이어 격파되며, 프로이센 기병을 막아낼 수단은 사실상 사라지고 말았다.
기세를 탄 프로이센 기병대는 패주하던 프랑스 병력의 측후방을 휩쓸며
막대한 전과를 올렸다.
굳건해 보이던 프랑스군의 방어선은 이 기병 돌파를 계기로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국 뮈커른 전투는 프로이센의 맹활약을 앞세운 연합군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양측 합쳐 약 4만 1천 명이 맞붙은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약 7천 명의 피해를 입었고,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 역시 9천 명에 달하는 손실을 치렀다.
% 한 때 유럽 최강이라 불리던 프랑스 제국의 기병대는 러시아 원정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으며 사실상 붕괴 상태에 놓여 있었다.
당시 프랑스 기병대로는 연합군의 기병대를 상대할 수 없었다.
라이프치히 서쪽의 린데나우(Lindenau) 를 향해 진격했다.
마침 이 무렵,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 남쪽에서 반격을 개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린데나우 방어가 위태로워지자
프랑스군은 예비대를 서쪽으로 돌릴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 남쪽에서 시도된 나폴레옹의 반격은 결정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좌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린데나우를 끝내 사수했다는 사실에 작은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라이프치히 전투 첫째 날은 막을 내렸다.
1813년 10월 17일
러시아군의 맹공을 견디지 못한 바르샤바 공국군은 끝내 전선을 지켜내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프로이센 기병대의 맹활약 역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프랑스 기병대를 정면으로 유린하며 완전히 패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전선 곳곳에서 악재만이 쏟아지던 그때,
1만 4천 명에 달하는 프랑스 지원군이 도착했다.
잠시나마 한숨을 돌린 나폴레옹이지만..
같은 날,
연합군 진영에는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가 이끄는 14만 5천 명의 스웨덴군이 도착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라이프치히의 프랑스군은 사방에서 밀리고 또 밀려,
포위 직전의 절체절명 상황에 놓여 있었다.
프랑스군의 보급 물자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더 이상의 전투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마침내 정치적 타협을 시도한다.
그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에게
일부 영토 할양을 조건으로 한 휴전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연합군에 의해 가볍게 무시당한다...
연합군은 사방에서 압박을 가하며
라이프치히 시내로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오스트리아군은뢰스니히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
기세를 이어 될리츠까지 점령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청년 근위대가 즉각 반격에 나서며
치열한 백병전 끝에, 될리츠를 다시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비록 될리츠는 되찾았지만,
프랑스군의 전반적인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최악에 치달아 있었다.
라이프치히 남동쪽의 프로프스타이다에서도 러시아군과 프로이센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프로프스타이다는 프랑스군에 의해 강력하게 요새화된 지역이었기에,
연합군 지휘부는 원래 이곳을 정면으로 공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드르 1세의 강력한 요구로 인해
연합군은 마지못해 프로프스타이다를 향한 공격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연합군은 요새화된 프로프스타이다를 향해 대대적인 포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그들을 맞이한 것은 프랑스군의 근위 포병대였다.
압도적인 기량 차이로 인해 포격전은 연합군의 패배로 끝난다.
결국 연합군은 충분한 포병 지원 없이 총공세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대군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연합군은 프로프스타이다 외곽을 점령하는 등
일시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나..
프랑스 보병대의 끈질긴 저항과 근위 포병대의 정확한 포격 앞에서
끝내 도시에서 밀려나 개활지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조아킴 뮈라가 이끄는 프랑스 흉갑기병대가 양쪽에서 동시에 튀어나왔다.
번뜩이는 흉갑을 두른 기병대의 돌격에
개활지에 노출된 연합군은 순식간에 막대한 피해를 입기 시작했다.
연합군은 궤멸 직전까지 몰렸으나,
러시아 기병대의 필사적인 역습 덕분에 간신히 전열을 수습하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증원군이 도착하자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은 다시 반격에 나섰지만,
프랑스 근위 포병대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 공세는 점점 힘을 잃어갔다.

연합군은 이어진 프랑스 보병대의 총검 돌격에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차르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더 많은 보병대를 전선에 밀어 넣으며 공세의 강도를 한층 끌어올렸다.
마침내 러시아군은 정예 척탄병까지 투입해 전면적인 총공세를 감행했다.
이들은 프랑스 포병의 맹렬한 사격 속에서도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격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끝없이 밀려드는 연합군의 물량 앞에서,
프로프스타이다를 지키던 프랑스 수비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려들었다.
그 순간,
나폴레옹이 직접 이끄는 프랑스 선임 근위대가 마침내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예 중의 정예가 투입되자
러시아군의 맹공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저지되었다.
러시아군 지휘부는 알렉산드르 1세에게 이에 맞서 러시아 근위대를 투입하자고 건의했지만,
차르는 이를 끝내 거부했다.
결국 프로프스타이다를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공방전은 이 지점에서 마무리된다.
프랑스군은 가까스로 전선을 지켜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하루 종일 이어진 격전의 대가로 이미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피해를 입고 있었다.
그날 밤,
프랑스군은 프로프스타이다를 포기하고 조용히 후퇴를 시작한다.
% 프랑스 선임 근위대는 당대 최강으로 평가받던 근위대로, 정예 중의 정예였다.
이들은 수많은 전투를 살아남은 베테랑으로 구성되었으며,
엄격한 선발 기준과 철저한 훈련을 통과한 인간 병기들이었다.
전장에 선임 근위대가 모습을 드러내고 그들의 행진곡이 들리기만 해도
적들은 벌벌 떨며 도망쳤다고 전해진다.




한편,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군은 프랑스군과 작센군이 방어하고 있던
파운스도르프를 향해 공격을 이어가고 있었다.
프랑스 포병대는 근거리에서 산탄 사격을 퍼부으며 연합군의 공격을 여러 차례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전황은 곧 뒤집힌다.
소수의 영국군이 발사한 콩그리브 로켓이 전장에 떨어지자
전례 없는 무기와 굉음에 충격을 받은 작센군의 전열이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프랑스군은 버텨냈고, 작센군은 흔들렸다.
전선은 일진일퇴의 혼전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전투 도중에 작센군이 프랑스군 전선에서 이탈해, 연합군 방향으로 전력질주하기 시작했다.
처음 프랑스군은 그들이 돌격을 감행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잠시 후,
작센군이 그대로 연합군 대열에 합류하는 광경을 목격하는 순간,
프랑스군은 이것이 배심임을 깨닫는다.
설상가상으로 뷔르템베르크군마저 프랑스군을 등지고 전선을 이탈했다.
그렇다.
라인 동맹이 이 순간을 기점으로 프랑스 제국에게 완전히 등을 돌린 것이다.
결국 프랑스군은 더 이상 방어를 유지할 수 없었고,
파운스도르프는 허무하게 연합군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나폴레옹은 마침내 좌절했다.
이미 한계까지 몰려 있는 상황에서
라인 동맹의 이탈은 라이프치히에 고립된 프랑스군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타격이었다.
더 이상 이곳에서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결국 야음을 틈타 라이프치히를 탈출하라는 철수 명령을 내린다.
1813년 10월 19일, 오전 7시.
연합군은 마침내 나폴레옹의 퇴각 움직임을 포착했다.
연합군은 포위망을 형성한 모든 전선에서 일제히 총공세를 개시했다.
프랑스군 원수 니콜라 우디노가 지휘하는 부대는 라이프치히에 남아
추격해 오는 연합군을 필사적으로 저지했고, 나머지 프랑스군 주력은 서쪽을 향해 퇴각을 시작했다.
그러나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퇴각을 위해서는 엘스터 강을 건너야 했는데
인근에 남아 있던 다리는 단 하나뿐이었다.
나폴레옹은 엘스터 강의 다리를 건너며 마지막으로 한 가지 명령을 남겼다.
아군이 완전히 철수한 이후, 연합군이 접근하는 것이 확인되면 지체 없이 다리를 폭파하라는 것이었다.
그 임무는 다리 방어를 맡은 몽포르 대령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혼란 속에서
폭파 임무는 하급 장교와 공병 병사에게 위임되었고,
명확한 철수 완료 신호를 전달받지 못한 채 상황 판단에 맡겨지고 말만다.
그리고 오후 1시 무렵, 아직 수많은 프랑스 병사들이 다리를 건너고 있던 바로 그 순간..
공병 병사는 너무 이른 시점에 폭파 장치를 작동시켜 버렸다...
문제는 니콜라 우디노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 부대가
여전히 라이프치히 시내에서 연합군의 추격을 필사적으로 저지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 사이 다리 주변은 서쪽으로 퇴각하려는 프랑스 병사들로 이미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엘스터 강의 다리가 붕괴되자,
프랑스군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에 빠져들었다.
병사들은 서로 먼저 강을 건너려다 물에 빠져 익사하거나, 인파에 떠밀려 압사당했으며
그 희생자는 수천 명에 달했다.
결국 퇴각로가 완전히 차단되면서, 라이프치히에 고립된 우디노 원수 휘하의 프랑스 병력은
상당수가 무기를 버리고 연합군의 포로가 되고 만다.
% 이 과정에서 폴란드의 구국영웅인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가 익사했다.
프랑스군의 피해는 실로 막대했다.
전투 전반에 걸쳐 3만 8천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고,
1만 5천 명이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다.
또한 15명의 프랑스 장군이 전사,51명이 부상을 입는 등
지휘부 역시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미 극심한 소모에 시달리던 프랑스군에게 이 패배는 결정타였다.
이 전투 이후 라인강 동쪽에서 프랑스 제국의 영향력은 완전히 소멸되었고,
그동한 형식적으로나마 충성을 유지하던 나폴레옹의 동맹국들마저
모두 등을 돌려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했다.
연합군은 마침내 프랑스 본토 침공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몰락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1위
2위
3위
가지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