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5월 제5기 한총련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의 출범식이
한양대학교에서 열릴 예정이었는데 정부와 경찰은 이것에 대해 경고했고
출범식을 진행하려는 시위대와 전경 간의 충돌이 벌어졌고
시위대는 지하철 운행을 방해하는 등 시위를 지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는데
5월을 넘어 97년 6월이 되면서 큰 사건이 발생한다
97년 6월 3일 23살의 선반기능공이었던
'이석' 은 한양대학교에 방문했다가 그를 경찰 프락치라고 생각한
학생들에게 붙잡혀 학생 회관 5층으로 끌려가
두 손을 묶인 채 신문을 받게 된다
프락치가 아니었던 이석은 당연히 부정했지만 한총련 사수대는
그가 거짓말 한다고 여기고 침낭으로 감싼 뒤 주운 진압봉과 몽둥이로
집단 구타를 가했고 물을 뿌리고, 최루 분말을 코에 뿌리는 등
사실 상의 고문을 가했다
침낭으로 감싼 건 구타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 라고한다
6월 3일날 시작 된 구타와 고문은 장장 15시간 가까이 이어졌고
결국 4장 짜리 거짓 자백서를 받아냈으나 6월 4일 오전 9시 경
이석의 호흡이 멈췄고 끝내 사망하고 만다.
당시 학생 회관으로 구급차를 요청했으나
한총련 사수대가 제지해서 교내로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조사에서 당시 한총련 관계자인
이준구는 폭행이 지나치다는 일부의 만류에
'지금은 전쟁 중이다 인륜을 생각을 겨를이 없다' 며
폭행을 독려한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주기도 했으며
한총련 지도부는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다 발각되어
큰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준구는 도피해 은신처로 들어가려다 9월 2일
잠복 중이던 수사대에 체포된다
일면식도 없는 20대 또래를 프락치로 몰아 구타해 사망케 한
이석 치사 사건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고
국민, 정계 여당, 야당, 언론 할 것 없이 큰 비난을 퍼붓고 질타했으며
- 사건에 관계 된 당시 서총련 투쟁국장 김호 -
당시 사건에 가담한 인물과 한총련에 대한 수사기관의
강도 높은 조사가 시작됐고 도피한 이들도 지명수배 된 후
한 명씩 체포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고 실형을 선고 받았으며
1996년 연세대 점거 사태와 1997년 같은 해 벌어졌던
이종권 치사 사건에 이어 벌어진 이석 치사 사건은
운동권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 악화와 민주화 이후 명분 약화,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힌 사건들로 남아있다.